형식상 법으로 등재되어 실제로 적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이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법을 우리는 “악법(惡法)”이라 부른다. 이러한 악법들은 흔히 기득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정의에 반하는 내용을 포함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악법”이라 불리는 법이 있다. 바로 레몬법이다.

레몬법은 차량 및 전자 제품에 하자가 발견되었을 시, 제조사가 책임지고 교환, 환불, 보상 조치를 하도록 제정된 소비자 보호법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소비자의 억울함을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거면 왜 만들었냐?” 소리까지 나온다는 레몬법의 현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레몬법은 시큼한 레몬을
하자 제품에 빗댄
소비자 권익 보호법이다
레몬법은 1975년, 미국에서 처음 제정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발의자들의 이름을 딴 “매그너슨-모스 보증법”이다. 오렌지처럼 달콤한 외관을 갖고 있지만 내용물은 시큼한 레몬을 하자 제품에 빗대어 레몬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내 소비자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레몬법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불과 작년 때의 일이다.

2019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한국형 레몬법은 ‘신차 구입 후 1년, 주행거리 2만 km 이내에 중대한 하자로 2번, 혹은 일반 하자로 3회 이상 수리를 진행하고도 증상이 지속되면 제조사에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레몬법에 의거하여 교환이나 환불을 받은 소비자들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우수하여 제품 하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출처_국토교통부 자동차 안전, 하자심의 위원회)

중재 신청 건수는 619건,
하지만 레몬법의 실효성은
여전히 지적되고 있다
2020년 11월 현재까지 자동차 안전 하자 심의위원회 중재 신청 건수는 619건에 달한다. 이 중 중재를 진행하고 있는 건수는 283건, 종료된 건수는 274건이며 중재 삭제 건수는 62건이다. 신청 건에 대해서 지금도 활발히 중재를 진행하고 있고, 종결된 건수도 반 이상이 넘는다. 그럼에도 레몬법의 실효성에 대한 이야기가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하자 심의위원회를 통해 중재가 진행된 건들은 중재 종료, 삭제 등으로 어떻게든 처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제조사와 소비자의 합의를 통한 것일 뿐, 심의 위원회를 통해 명백한 하자가 밝혀지거나 이를 근거로 한 레몬법이 적용되어 보상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자료 상으로 2020년 1분기까지 소비자가 하자 심의 위원회의 심의 결과로 인해 교환, 환불을 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자를 입증하느라 긴 싸움을 이어가며 지친 소비자들은 제조사들이 내건 합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사건을 종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심의 위원회의 중재가 종결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제품의 어떤 하자 때문에 어떻게 배상이 진행되었는지의 상세 여부는 공개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로 레몬법이 갖고 있는 실효성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레몬법이 탄생한 미국에서 레몬법은 소비자의 권익을 증진시키고, 모든 기업을 떨게 하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런 레몬법이 한국에선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우리나라에는 레몬법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레몬법은 법적 강제성을 띠고 있으며, 이를 따르지 않을 시 엄청난 배상액을 지불해야 한다. 단순히 문제가 된 제품을 배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징벌적 손해 배상금이 청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업은 소비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레몬법은 법적 강제성이 없으며 단순 권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소비자에게 손해가 발생했을 시의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실제 손해액의 3배 정도에 불과하여 기업 입장에선 큰 타격이 없다.

징벌적 손해 배상이 적용되는 범위도 다르다. 미국의 경우 징벌적 손해 배상 대상에는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 피해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었을 때에만 징벌적 손해 배상이 적용될 뿐, 재산 피해의 경우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출처_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소비자가 직접
결함을 입증해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이다
제품에 하자가 발생했을 시,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해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도 레몬법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의 경우 하자 심의가 진행되면 문제가 제기된 제품에 대해 하자가 없다는 사실을 제조사에서 직접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로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 2항에는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사실’, ‘손해가 제조물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때문에 소비자가 레몬법으로 보상을 받기 위해선 제조물 책임법에 의거하여 제품 하자를 직접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소비자는 제품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원인 규명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럼에도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출처_달성소방서)

사회적 이슈가 되어야만
국가 기관이 개입한다
국가기관의 개입 여부도 실효성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다. 미국의 경우엔 동일 차종에서 동일 증상이 반복적으로 발생될 경우, 곧바로 공공기관이 전수조사에 착수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국토부와 같은 기관이 기업에 개입을 하지만, 국가기관의 개입까지 이뤄지는 과정이 미국에 비해 느리고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다.

피해 당사자가 국민 청원이나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문제를 제기하여 어느 정도 이슈화가 진행되어야 국가 기관이 개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 이슈가 된 코나 일렉트릭 화재 사건의 경우에도 12번째 화재가 발생하고 나서야 국토부에서 조사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명백히 리콜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국토부는 현대차에 대해 무상수리 권고 조치를 내리는 정도에만 그쳐 소비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출처_MBC뉴스)

불합리에 고개 숙였다면
지금 같은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법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불합리함에 순응하며 살아왔다면, 지금과 같은 발전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지난 13일, 노동자의 인권 신장을 주장하며 분신 투쟁을 펼친 전태일 열사가 50주기 기일을 맞이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전태일 열사의 희생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악법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